• 불교의 시작은 거룩한 깨달음의 사랑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20-05-11 / 조회 : 97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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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불교의 시작은 거룩한 깨달음의 사랑

중간제목/ 깨달음을 바탕으로 새로운 세계를 인식하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 우주와 자신이 하나임을 알아가길...

 

 나를 둘러싸고 있는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가 나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지혜이고 그를 위해 끝 쪽으로 가서 그들과 함께하여 그들의 고통을

없애주는 것이 바로 자비행이다

6년 동안 모진 고행을 하신 부처님이 어느 날 아침 보리수 나무 아래서 동쪽 하늘에

떠오르는 별을 보고 홀연히 깨달았다.

그의 존재가 무한대의 시 공간에 놓여 있다는 것을 우주와 자신이 하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삶도 죽음도 결국 따로 없다는 것을, 오고가는 그 무엇도 없다는 것을 인식 했다.

모든 중생들이 세세생생 거듭하는 삶과 죽음 이라는 덫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워진 것이며 바른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얻은 것이다.

우리는 이를 열반 이라고 부른다.

부처님은 그 깨달음의 경험을 혼자만 간직하려 하지 않고 무한한 열반의 자리인 보리수

나무를 박차고 나와 고통의 현장인 속세로 나오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자 대비심 이다. 위대한 사랑인 것이다.

이 거룩한 깨달음의 사랑이 바로 불교의 시작이었다.

불교의 목적은 깨달음을 얻고 모든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다.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 두 가지는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깨닫고 가르치는 것은 수레의 양쪽 바퀴와도 같은 것이다.

한쪽이 고장이 나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우리나라 불교는 대부분 대승 불교를 표방해 왔다.

따라서 대승 불교의 이상적인 수행자 상인 보살이 매우 중시 되었고 보살의 수행 목표인

상구보리 하화중생 역시 우리나라의 불자에게 필수적인 것이 됐다.

신라의 원효는 기신론소에서 대승기신론을 지은 대의가 보살의 두 가지

목표인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평했을 만큼 이 두 가지 목표는 중요성을 가진다.

두 가지 가운데 특히 하화중생은 불교가 사회의 대중 속에서 실현돼야 함을

강조함으로써 불교의 적극 적으로 사회 참여를 유도하는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원효는 진속 불이론(眞俗 不二論) 을 폈다.

유리창의 먼지만 닦아내면 맑고 푸른 하늘이 드러나듯 모든 사람의 미혹하고 망령된

마음만 닦아 내면 그들 마음속에 있는 부처가 저절로 드러난다,

깨달음과 해탈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안에 있다.

깨달음 이란 원래 깨달을 수 있는 바탕을 지니고 있는 인간이 어떤 깨기로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고 자신을 전혀 다른 존재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리 깨달아 부처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중생이 고통에 있는 한 나는 아직

부처가 아니다.

고통과 무명 속에 있는 중생을 열반으로 이끄는 그 순간에 나 또한 열반에 이르러 진정

해탈하게 된다,

중생이 고통 속에 있는 한 설령 깨달았다 하더라도 나는 아직 부처가 아니니 먼저

깨달은 자는 항상 큰 자비로써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중생의 의혹을

제거하고 삿된 집착을 버리게 해 그들을 깨달음에 이르도록 해야 한다

그럴 때 나 또한 깨달음의 세계에 이를 수 있다.

상구보리 와 하화중생 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무관세음 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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