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사는 신라말 고려 충렬 왕 때 창건하였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러 선종의 총 본산으로 한국 불교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불교계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그동안 역대 큰스님들의 원력과 신도들의 간절한 발원으로 전법출사를 시작한 이래 경기지역의 포교 1번지로써 청계사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전법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불자교육 및 조직화이므로 제반 사업운용을 온, 오프 라인을 병행하여 모든 불자들이 일상 생활에서 신행 및 문화 활동을 통하여 변화된 삶의 모습에서 성취감으로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더 나아가 현장에서 전법 교화하여 각정된 사회를 이룩해 나가기 위하여 사찰운영위원회를 통하여 효율적인 종무운영 및 신도 활성화를 위하여 포교활동의 기틀을 마련해 나가고 있다.

또한 21세기 시대변화에 따라 지역사회발전을 위하여 사회복지 서비스차원에서 각 기관과 유관 공조체제를 통하여 공존하며 더 나아가 지역주민들을 위한 정신적 귀의처로써 전법활동에 앞장서 나가고 있다.

청계사의 역사

창건

청계사의 정확한 창건 연도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봉은사의 사적을 기록한 봉은본말사지(奉恩本末寺誌)에는 신라 때 창건되었다는 내용이 있으나 구체적 근거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사찰 경내에 있는 석등과 부도 일부는 신라 때 것으로 추정되므로 신라시대의 창건설은 믿을 만한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청계사에 관련된 기록은 대체로 고려 후기가 되면서 집중적으로 보인다. 곧 1284년(충렬왕 10) 당대의 세력가였던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조인규(趙仁規, 1227~1308)가 막대한 사재를 들여 중창하면서 청계사가 역사적으로 크게 부각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고려시대의 청계사

조인규의 중창

청계사의 역사에 있어서 고려 말부터 조선시대 전 기간을 통하여 청계사의 중요한 후원자였던 조인규 및 그의 후손들을 빼놓고 말 할 수는 없다. 조인규가 1284년 청계사를 대대적으로 중창하였음은 이미 앞서 말한 바와 같은데, 그는 청계사를 중창하면서 사찰 아래쪽에 별당을 짓고 거주할 정도로 대단한 관심을 보였던 것이다. 고려시대의 왕실과 귀족들 사이에는 이처럼 원찰(願刹)을 지어놓고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 사례가 빈번하였다. 이것이 때로 부정적 측면을 빚기도 했지만 불교 융성의 큰 뒷받침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조인규는 평양 상원(祥原) 지역의 미미한 가문에서 출생하였고, 청년 시절 역시 그다지 뛰어난 행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가 중앙의 정치 무대에서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결정적 계기는 43세 때 세자의 신분이었던 충렬왕을 수행하여 원나라에 다녀오면서부터다. 기록에 의하면 조인규는 몽고어 통역관을 뽑는 양성 시험에 합격한 후 상당한 노력으로 몽골어에 정통하였다고 한다. 충렬왕이 원나라 세조의 딸인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하자 조인규는 공주와 긴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하였고 결국 공주의 세력을 바탕으로 정치적 성장을 할 수 있었다. 충렬왕이 즉위하니 조인규의 지위는 점차 향상되었고, 원나라 세조로부터도 신임을 얻어 원나라 관직을 제수받기도 하였다.

그는 1292년 그의 딸이 세자비로 간택되면서 조정에서 가장 유력한 존재가 되었다. 1298년 사위인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하자 사도시중참지광정원사(司徒侍中參知光政院事)가 되어 개혁 정책을 크게 뒷받침하여 주었다. 그러나 충선왕비인 계국대장공주가 조비(趙妃)를 질투하여 일어난 조비무고사건으로 왕이 7개월만에 퇴위되고 충렬왕이 복위하면서 조인규도 원나라에 끌려가 안서(安西)지역에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6년 후인 1305년 방면되어 원나라 황제의 명으로 판도첨의사사(判都僉議司事)에 임명되면서 다시 관직에 복귀하였다. 1307년에는 원나라 무종(武宗)을 옹립하는 데 공을 세운 충선왕의 정치력이 복권되었으며, 이에 따라 조인규도 다시 자의도첨의사사 평양군(恣議都僉議司事平壞君)에 봉해지면서 선충익대보조공신(宣忠翊戴輔祚功臣)이 되었다.

말년에 누린 그의 권세는 곧 그의 가문이 튼튼한 세력을 구축해 가는데 밑받침이 되었으며, 그의 아들들은 모두 재상의 지위까지 오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조인규가 1284년 청계사를 중창하고 자신의 원찰로 삼았다는 사실은 이후 청계사의 역사에 결정적 전환의 계기가 될 수 있을 만큼의 중요한 것이었다. 이 시기는 조인규의 정치적 활동이 절정에 달해 있을 정도로 막대한 권세를 누리던 때였으며, 그의 권세가 그대로 사찰 중건에 이어졌음을 감안한다면 그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가는 쉽게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후손들이 지속적으로 사찰 지원에 관심을 보이고 영당(影堂) 관리를 해왔음을 볼 때, 조인규가 나타내었던 청계사에 대한 열정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결국 청계사가 오늘까지 그 전통을 유지해 올 수 있었던 데는 조인규와 그의 후손들에 의해 조성되었던 물질적 기반이 중요하게 작용하였던 것이다.

청계사의 연혁

청계사는 서울 근교에 위치해 있으면서 주변경관이 아름다워 많은 신도와 등산객들이 찾고 있다. 전각으로는 극락보전과 요사를 비롯한 10여 채의 건물이 있고 경내에는 국가보물 제11호인 동종과 경기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135호인 목판이 있다. 봉은본말사지에는 1879년까지의 간략한 연혁이 서술되어 있으며, 그 밖에 1689년 건립된 청계사사적비(淸溪寺事蹟碑)와 1881년 작성된 경기좌도광주군청룡산청계사중건기(京畿左道廣州郡靑龍山淸溪寺重建記)를 통해 일부 연혁이 확인된다.

청계사는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 경허 선사의 출가자로 경허선사의 선맥을 이은 만공, 금오, 월산 선사의 체취가 경내 곳곳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청계사 창건연대는 확신치 않으나 통일신라 때 창건된 유서 깊은 사찰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세종 때 1차 중창, 숙종 때 2차 중창을 거쳐 사격을 유지해 내려오다가 지난 2001년 종상스님이 주지로 부임해오면서 사격을 일신하고 진입로 불사를 마무리해 대찰의 면모를 갖췄다. 현재는 성행스님이 주지를 맡아 경허, 만공, 금오, 월산 선사의 부도를 조성하는 등 회주종상스님의 지도아래 민족 문화사적 위상제고를 위하여 경허 스님등 청계사와 인연을 가졌던 한국불교의 빛나는 고승 4분의 부도탑 조성을 위하여 선종 종찰로서 명실상부한 “ 한국 선불교 중흥 본찰” 로서 거듭나게 되어 호국안민은 물론 그 위업을 길이 계승하고 후손들의 정신교육의 산실로서 지역사회의 역사문화교육의 산 현장이 되고 있다.

청계사와 우담바라

청계사에서는 최근 2000년 10월 극락보전에 봉안된 아미타삼존불 가운데 관음보살상의 상호 횐쪽 눈썹 주변에 우담바라 꽃이 피어 세간에 큰 화제가 되었다.

우담바라는 경전에 따르면 여래나 전륜성왕이 나타날 때 나타나며 3,000년 만에 한번 핀다는 전설 속의 꽃이어서 청계사에 그모습을 나타내자 전국의 불자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도 놀라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었다. 우담바라가 피면 영화스럽고 상서로운 일이 일어난다하여 영서화(榮瑞花)라고 부르기도 한다.
청계사의 이 우담바라는 높이 1cm의 작은 크기로 모두 21송이가 피었으며, 아직도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청계사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같은 해 10월 6일 ‘우담바라 108일 무차정진 대법회’를 가져 201년 2월 1일 회향하기도 하였다. 내년 5주년을 맞이하여 우담바라 꽃의 의미를 재 조명하기 위하여 다양한 전법활동을 펼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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