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위를 피해서 뭣하리!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1-02-28 / 조회 : 3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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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104-4면 지혜의 등불


 더위를 피해서 뭣하리!


더워야 할 때 제대로 덥지 않은 것 재앙

‘덥다’ 생각 버리고 치열하게 정진하길


동산선사에게 어떤 납자가 물었다.

“더위가 닥쳐오니 어떻게 피하리까?”

“무엇 때문에 더위가 없는 곳으로 가지 않느냐?”

“더위 없는 곳이 어디 입니까?”

아닌 게 아니라 정말 덥다. 지구 온난화 덕분인지 여름을 맞는 체감온도는 해마다 더 뜨거워지는 같다. 하긴 본래부터 ‘삼복더위’라고 했으니 더울 때가 되어 더운 것인데 중생들은 이를 무슨 새로운 사건이라도 생긴 것처럼 해마다 별스러운 일로 받아들인다. ‘무더위’라는 낮 시간대에 국한된 더위의 고전적 표현은 이제 ‘더워서 잠 못 이루는 밤’이라는 ‘열대야’로 이어졌다. 여름을 앞둔 일기예보의 으름장은 에어컨 수요를 더욱 부채질한다. 하지만 실내를 시원하게 만든 과보로 바깥 기온을 더 뜨겁게 만든다는 사실을 잊고 산다. 어쨌거나 더 큰일은 더운 것 보다는 더워야 할 때 제대로 덥지 않은 일인 것이다. 그건 재앙이다.

여름을 맞이하는 마음가짐에도 두 종류가 있다. 더위를 피하고자 하는 피서파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이열치열’을 외치는 영서파(더위에 맞서고자 하는 분류)도 있기 마련이다. 사실 선종 입장은 피서파가 아니라 영서파를 추구한다. 무정물인 연꽃은 더위를 즐기는 모양새다. 한창 더울 때 한반도 곳곳에서 연꽃축제가 열리기 때문이다. 더위를 이겨내는 당당한 자태는 보는 이로 하여금 더위초차 잊게 한다. 굳이 분류하면 연꽃도 영서파에 속한다 하겠다. 예전에 추운 정월 대보름날 미리 ‘더위팔기’를 했다. 아침 일찍 아는 사람을 만났을 때 재빠르게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른 뒤 “내 더위 사가거라”하고 외치면 끝난다. 그 공덕으로 그 해는 더위를 먹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렇다고 해서 상대방이 일방적으로 당해야 한다면 이건 불공평한 일이다. 모든 거래는 늘 동등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위를 사라’라는 말을 듣더라도 긍정하지 않고 도리어 ‘내 더위 먼저 사가시오’라고 반격하면 오히려 상대방의 더위까지 떠안고 오게 된다. 혹 떼려다가 혹 붙이는 셈이다. 이를 ‘학’이라고 이름 붙였다.

더위가 없는 곳은 없다. 성경에는 ‘땅이 있을 동안에 추위와 더위가 쉬지 않으리라’하였다. 이슬람의 금욕정진 기간인 ‘라마단’은 그 뜻이 ‘타는 듯 한 더위’라고 했다. 더위를 수행으로 극복하자는 뜻이 깔려 있다. 정조대왕의 어록인<일득록>에는 나름대로 성군다운 피서법이 나온다. 더위를 물리치는데 독서만큼 좋은 방법이 없다. 책을 읽으면 몸이 치우치거나 기울어지지 않고 마음을 다스리는 능력이 생겨 바깥의 더운 기운이 자연히 들어오지 못하게 된다. 독서삼매를 통하여 더위를 잊고자 하는 경지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어떤 납자가 노숙에게 물었다. “날씨가 더우니 어디로 피해야 합니까?” “끓는 기름 가마솥으로 피하라.” 더 과격한 서어록의 표현을 빌리자면 ‘더운 날 시원하고 싶다면 화탕노탄 속을 향해서 뛰어들라’고 했다. 화탕은 물이 펄펄 끓는 곳이고 노탄은 숯불이 벌겋게 불붙어 있는 상대를 말한다. 이 말에 대하여 무비스님은 이렇게 해석했다.

더위를 의식하고 사는 것 자체가 열렬하게 그 무엇인가에 마음을 쓰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다. 일생을 던져도 아깝지 않은 일에 마음을 쓴다면 그 까짓것 더운 것이 뭐 그렇게 문제될 것이 있겠는가? 열심히 정진하면 더위도 잊는다. 덥다는 것은 제대로 정진하지 않는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오히려 화탕노탄의 불처럼 치열하게 정진하라. 더위를 의식한다면 그게 뭐 제대로 된 공부를 하는 사람이라고 하겠는가? 마치 어떤 사람이 화탕노탄 지옥에 들어가도 타거나 데이지 않아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도 평상심을 영원히 잃지 않을 수 있다면 어떤 곳에 있다고 할지라도 영원히 휴식을 얻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이산 혜연 선사 발원문에서 말하는 화탕지옥 끓는 물이 감로수로 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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