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대 마음 챙김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23-03-16 / 조회 : 1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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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에 대한 마음챙김 수행 

 

 

 


위빠사나 까마타나 (Vipassana Kammatthana)

 

위빠사나 까마타나(마음챙김 참선수행)는 사마타 까마타나(마음집중 참선수행)와는 달리 개념적 대상이 아니라 빠라마타 (Paramatha,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궁극의 실재'이나 수행 안에서의 실제의 의미는 '존재의 실상'으로 이해하면 무난)에 마음챙김을 합니다.

 

 

 

예를 들면, 호흡에 따른 배의 '일어남'을 마음챙김할 때 배의 형태, 모양 (Pannati)은 놓아버리고 팽창감, 단단함, 움직임의 양상 등의 빠라마타를 꿰뚫어보듯이 집중하여 그것의 변화의 과정을 관찰합니다.

 

이렇게 하면 수행자의 마음챙김은 존재의 무상한 성품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현상을 마음챙김의 대상으로 하여 그 존재의 실상을 이해하는 목적으로 행하는 수행을 위빠사나 까마타나 (마음챙김 참선수행)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방법은 마음의 청정은 물론이고 지혜의 계발을 통하여 존재의 실상을 깨닫기 위한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띠빠타나 (satipathana, 알아 차려서 마음챙김 함) 혹은 위빠사나 (vipassana, 대상을 알아차려서 정관함), 즉 마음챙김 참선 수행은 사띠빠타나 경(Satipathana Sutta)과 마하사띠빠타나 경(Maha Satipathana Sutta)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이들 경전의 내용을 중심으로 마음챙김 수행의 개괄적인 면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몸(육체적인 기관), 느낌, 마음, 법, 이 네 가지는 우리가 흔히 '나'라고 표현하고 있는 우리 자신에 해당하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사항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우리 자신의 통찰을 위한 네 가지 관찰의 대상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깨어있음을 마련해주는 네 가지 접근 대상이며, 나아가서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깨닫게 해주는 통찰의 대상입니다. 사실 이외에는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네가지 대상을 통하여 모든 인식 대상의 본질을 확연하게 보아, 종국에는 깨달음에 이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마음챙김 참선 수행에는 네가지 마음챙김의 방법이 있습니다.

 

 

 

몸에 대한 정관, 느낌에 대한 정관, 마음에 대한 정관, 법에 대한 정관이 바로 그것들 입니다. 이같은 몸에 대한 정관, 느낌에 대한 정관, 마음에 대한 정관, 법에 대한 정관을 신, 수, 심, 법의 사념처 정관수행이라고도 합니다.

 

 
몸에 대한 정관

 

루빠 (rupa, 물질,육체)의 성품을 규정하는 요소들로는 28항이 있습니다.

 

4 마하-부타(maha-butha) : 4대
6 근 : 눈, 귀, 코, 혀, 몸, 의식
2 성 : 남, 여
생명력 ; 생명의 물질로서의 활력

 


영양분
4 감각 : 형상, 소리, 향기, 맛
물질적인 면에서의 한계 : 공간의 요소
의사 전달에서의 물질적인 항 : 몸짓, 목소리
가소성 : 가벼움, 부드러움, 적응성
물질적인 면의 4가지 현저한 특성 : 발생과 성장, 지속, 쇠퇴, 소멸

 

루빠는 업(kamma), 마음(citta),  온도(utu),  영양분(ahara) 의 네가지 요소에 의하여 항상 유위적으로 만들어 집니다. 그리고 이들 28항의 요소들은 '내면의 눈'에 의해서만 보여집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뚱이를 당연히 '나',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며, 나의 몸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붓다께서 몸에 대한 정관을 말씀하신 취지를 알고 나면 우리는 전혀 그렇지 못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몸에 대한 진정한 관찰이 없었기 때문에 마음속에 탐욕, 집착, 아상등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붓다께서는 "비구들이여, 신체에 대한 정관의 맛을 본 사람은 죽지 않음의 맛을 못보고, 신체에 대한 정관의 맛을 못 본 사람은 죽지 않음의 맛을 본다"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몸에 대한 정관 없이 죽지 않음 즉 열반을 증득할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사띠빠따나 숫따에서 붓다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빅쿠들이여 신체에 대한 정관은 어떻게 닦고 익혀야 큰 결과와 공덕이 있는가? 비구들이여, 여기에 어떤 비구가 가거나 나무 아래에 가거나 빈방에 가거나하여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곧바로 세우고 앉아 마음을 챙긴다.

 

 

 

그는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쉬는 것에 마음챙김 한다. 길게 들이쉬며는 '나는 길게 들이쉰다'는 것을 알고, 짧게 들이쉬며는 '나는 짧게 들이쉰다'는 것을 알고, 길게 쉬며는 '나는 길게 내쉰다'는 것을 알고, 짧게 내쉬며는 '나는 짧게 내쉰다'는 것을 안다. 이렇게 '오온을 경험하면서 들이 쉬리라'고 하며 공부하며 '온 몸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하며 공부하고, '신행을 가라앉히면서 내쉬리라'며 공부한다. 그가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결연하게 살고 있으면 마침내 저 세속에 얽힌 기억과 생각들이 사라진다. 그런 것들이 사라지기 때문에 마음은 안으로 안정되어 고요해져서 사마디(samadhi, 삼매)를 이루게 된다. 바로 이와 같이 빅쿠는 몸에 대한 정관을 익힌다."

 

 

 

"다시 빅쿠들이여, 빅쿠는 걸어 가면서는 '나는 걷고 있다'고 알고, 서 있으면서는 '나는 서 있다'고 알며, 앉아 있으면서는 '나는 앉아있다'고 알고, 누워 있으면서는 '나는 누워 있다'고 안다. 또 그의 몸이 다른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던 간에 그 자세대로 안다.”

 

 

 

“다시 빅쿠들이여, 빅쿠는 나아갈 때에도 물러날 때에도 잘 알아차리며 행하는 사람이며, 구부릴 때에도 펼 때에도 잘 알아차리며 행하는 사람이며, 앞을 볼 때에도 뒤돌아 볼 때에도 잘 알아차리며 행하는 사람이다. 또 가사, 발우을 지닐 때에도 잘 알아차리며 행하는 사람이며, 먹을 때에도 마실 때에도, 음식을 씹을 때에도, 맛 볼 때에도 잘 알아차리며 행하는 사람이며, 대소변을 볼 때에도 잘 알아차리며 행하는 사람이며, 걸어면서, 서있으면서, 앉으면서, 잠들면서, 잠을 깨면서, 말하면서, 침묵하면서도 잘 알고 행하는 사람이다."

 

 

 

"다시 빅쿠들이여, 빅쿠는 이 몸이 여러 가지 부정한 것으로 가득 차 있음을 발바닥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며, 그리고 머리털에서 내려가며 관찰한다.

 

께사(kesa,머리털), 로마(loma,몸털), 나카(nakha, 손,발톱), 단따(danta,이빨), 따소(taco, 피부) ,
만상(mansam,살), 나하루(naharu,힘줄), 앗띠(atti,뼈), 앗티민장(atthiminjam,골수), 왓깡(vak- kam,신장)
하다양(hadayam,심장), 야까낭(yakanam,간), 낄로마깡(kilomakam,늑막), 삐하깡(pihakam,비장), 빳파상(papphasam,폐)안땅(antam,대장), 안따구낭(antagunam,소장), 유다리양(udariyam,위장), 까리상karisam,똥), 맛따룬강(mattalungam,대뇌) 삐땅(pittam,쓸개액), 샘항(semham,가래), 뿟보(puppo,고름), 로히땅(lohitam,피), 세도(sedo,땀), 메도(medo, 지방) 아쑤(assu,눈물), 와사(vassa,임파액), 케로(khero,침물), 신가니까(singanika,콧물), 라시까(lasika,관절액), 뭇땅(muttam,오줌) 등이 있다고,

 

 

 

빅쿠들이여, 이는 마치 양쪽에 뚫어져 있는 자루에 여러 가지 곡식 즉, 밭벼, 논벼, 콩, 완두, 기장, 현미등이 가득 담겨 있는데 어떤 눈 밝은 사람이 그 자루를 풀고 일일이 헤쳐 보면서 '이것은 밭벼, 이것은 논벼, 이것은 콩, 이것은 완두, 이것은 기장, 이것은 현미이다'하는 것과 같다.

 

 

 

바로 이와 같이 빅쿠들이여, 빅쿠는 이 몸이 여러 가지 부정한 것으로 가득 차 있음을 발바닥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며, 그리고 머리털에서 아래로 내려오며 관찰한다"

 

 

 

"다시 빅쿠들이여, 빅쿠는 이 몸을 요소별로 구성되어 있는 데로 작용하고 있음을 관찰한다. 이 몸에는 '땅의 요소, 물의 요소, 불의 요소, 바람의 요소'가 있다고, 비구들이여, 마치 솜씨 좋은 백정이나 그 조수가 소를 잡아서 각을 뜬 다음 큰 네거리에 벌여놓고 앉아 있는 것과 같다. 이와같이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 몸을 요소별로 구성되어 있는 데로 관찰한다. '이 몸에는 땅의 요소, 물의 요소, 불의 요소, 바람의 요소가 있다'고,

 

 

 

다시 빅쿠들이여, 빅쿠는 마치 묘지에 버려진, 죽은 지 하루나 이틀 또는 사흘된 시체가 부풀고 검푸러지고 문드러지는 것을 보는 듯이 자신의 몸을 그에 비추어 바라본다. '이 몸은 그와 같고, 그와 같이 될 것이며, 그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다'고,

 

 

 

다시 빅쿠들이여, 빅쿠는 마치 묘지에 버려진 시체를 까마귀가 마구 쪼아먹고, 솔개가 쪼아먹고, 독수리가 마구 쪼아먹고, 개가 마구 햟아먹고, 수없이 많은 갖가지 벌떼들이 덤벼들어 파먹는 것을 보는 듯이 자신의 몸을 그에 비추어 바라본다. '이 몸도 또한 그와 같고, 그와 같이 될 것이며, 그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고,

 

 

 

다시 빅쿠들이여, 빅쿠는 마치 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해골이 되어 살과 피가 묻은 채 힘줄로 얽히어 서로 이어져 있는 것을 보는 듯이 자신의 몸을 비추어 바라본다, '이 몸도 또한 그와 같고, 그와 같이 될 것이며, 그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고

 

 

 

다시 빅쿠들이여, 빅쿠는 마치 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해골이 되어 살과 피는 없고 힘줄만 남아 서로 이어져 있는 것을 보는 듯이 자신의 몸을 그에 비추어 바라본다. '이 몸도 또한 그와 같고 , 그와 같이 될 것이며, 그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고,

 

 

 

다시 빅쿠들이여, 빅쿠는 마치 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해골이 되어 힘줄도 사라지고 뼈들이 흩어져서 여기에는 손뼈, 저기에는 발 뼈, 또 저기에는 정강이 뼈, 또 저기에는 넓적다리 뼈, 엉덩이 뼈, 등 뼈, 갈빗대, 가슴 뼈, 팔 뼈, 어깨 뼈, 목 뼈, 턱 뼈, 치골, 또 저기에는 두 개골 등이 사방에 널려있는 것을 보는 듯이 자신의 몸을 비추어 바라본다. '이 몸도 또한 그와 같고, 그와 같이 될 것이며, 그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고,

 

 

 

다시 빅쿠들이여, 빅쿠는 마치 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해골이 되어 뼈가 조개껍질 색깔 같이 하얗게 백골이 된 것을 보는 듯이 자신의 몸을 그에 비추어 바라본다. '이 몸도 또한 그와 같고, 그와 같이 될 것이며, 그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고,

 

 

 

다시 빅쿠들이여, 빅쿠는 마치 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해골이 되어 단지 뼈 무더기가 되어있는 것을 보는 듯이 자신의 몸을 그에 비추어 바라본다. '이 몸도 또한 그와 같고, 그와 같이 될 것이고, 그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고,

 

 

 

다시 빅쿠들이여, 빅쿠는 마치 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해골이 되었다가 다시 삭아서 티끌로 변한 모습을 보는 듯이 자신의 몸을 바라본다. '이 몸도 또한 그와 같고, 그와 같이 될 것이며, 그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고,

 

 

 

다시 빅쿠들이여, 빅쿠는 모든 애욕을 떨쳐버리고 모든 좋지 못한 불선법을 떨쳐버리고 심( vitakka, 사유 과정의 시발 단계, 초선에서 심은 마음을 거듭 마음챙김의 대상에 데려오는 역할을 한다)과 사(vicara, 일단 일어난 사유가 지속되는 과정, 초선에서 사는 심을 고정시켜 닻을 내리게 하는 과정이다)가 있는 채로,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삐띠(piti, 기쁨)와 수카(sukha, 행복감)을 특징으로 하는 초선을 성취하여 거기에 머문다. 그는 이 몸을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감으로 흠뻑 적시시고 두루 채우고 충만 시키고 고루 베이게 한다. 온 몸 속속들이 떨쳐 버렸음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감이 베어들지 않은 데가 없다.

 

 

 

그가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결하게 살고 있으면 마침내 저 세속에 얽힌 기억과 생각들이 사라진다. 그런 것들이 사라지기 때문에 마음은 안으로 안정되어 고요해지고 전일해져서 사마디(samadhi, 삼매)를 이루게 된다. 빅쿠들이여, 바로 이와 같이 빅쿠는 '신체에 대한 정관'을 익힌다.

 

 

 

다시 빅쿠들이여, 빅쿠는 심과 사를 가시게 하여 내면의 적정과 마음의 집중이 있는 무심, 무사의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감을 특징으로 하는 제2선을 성취하여 머문다.

 

 

 

다시 빅쿠들이여, 빅쿠는 기쁨을 떨치고 대상을 알아차려 마음을 집중하여 그 현상을 관찰하며 평온(upekha)에 머문다. 아직도 몸으로는 행복감을 경험하면서, 성자들이 '평온을 이루어 정념하며 행복하게 산다'고 일컫는 바 그 제3선을 성취하여 머문다.

 

 

 

다시 빅쿠들이여, 빅쿠는 행복감을 떠나고 괴로움도 떠나고,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은 여의어서 불고불락인, 그리고 평온과 청정함이 있는 제4선을 성취하여 머문다.

 

 

 

그가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결연하게 살고 있으면 마침내 저 세속에 얽힌 기억과 생각들이 사라진다. 그런 것들이 사라지기 때문에 마음은 안으로 안정되어 고요해지고 전일해져 삼매를 이루게 된다. 비구들이여, 바로 이와 같이 비구는 '신체에 대한 염'을 익힌다."

 

 

 

붓다께서는 계속 설법하십니다.

 

"빅쿠들이여, 누구든지 신체에 대한 염을 익히고 끊임없이 닦는 사람은 지혜에 기여하는 모든 선법을 수용하게 된다. 빅쿠들이여, 마치 큰 바다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가득 차 있는 사람은 그 바다로 흘러드는 모든 강물도 수용하고 있는 것과 같다. 비구들이여, 바로 이와 같이 누구든지 '신체에 대한 염'을 익히고 끊임없이 닦는 사람은 지혜에 기여하는 모든 선법을 수용하게 된다.

 

 

 

빅쿠들이여, '신체에 대한 염'을 익히지 않고 끊임없이 닦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마라(죽음,장애)에게 틈을 주게 된다.

 

 

 

빅쿠들이여, 누구든지 '신체에 대한 염'을 익히고 닦는 사람은 신통지(abhinna)로 실현 시킬 수 있는 경지는 그것이 어떤 경지이든, 계제가 닿아 이에 마음을 기울이기만 하면 신통지에 의해 그 경지를 실현해 내는 능력을 지닐 수 있다.

 

 

 

빅쿠들이여, '신체에 대한 염'을 습관화하고 익히고 많이 닦고 향상의 수레로 삼고 기반으로 삼고 확립하고 공고히 다지고 적절히 시도할 경우 다음의 이익을 기대할 수 있다. 그 열 가지란 어떤 것인가?

 

그는 싫고 좋음을 극복한다. 그는 싫은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으며, 두려움이나 공포가 일어나는 족족 이를 극복해 버리고 지낸다.

 

 

 

그는 추위나 더위, 배고픔이나 목마름 또는 파리, 모기, 바람, 불볕, 기어다니는 짐승 등에 닿는 감촉을 참아내며, 몹쓸 소리로 박대하는 말씨나 이미 몸에 괴로운 느낌, 즉 예리하거나 거칠거나 격렬하거나 불쾌하거나 비참하거나 치명적인 느낌마저도 태연히 견뎌낸다.

 

 

 

그는 보다 높은 마음 선정을, 그것도 '지금 여기'서 바로 행복한 머무는 곳을 제공해주는 네 가지 선정을 힘들이지 않고 쉽사리 마음 내키는 대로 누리게 된다."

 

 

 

이와 같이 몸에 대한 마음 챙김을 합니다.

 

 

 

느낌에 대한 정관

 

인간들은 알게 모르게 즐거운 느낌은 더 늘리고 괴로운 느낌은 줄여 보려는 밑도끝도 없는 노력에 평생을 다 바치고 있습니다. 평범한 생활의 단순한 기쁨에서부터 야심가들의 권력욕이나 위대한 예술가들의 창조적 희열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인간적 야망과 투쟁도 따지고 보면 이 한가지 목적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즐거운 느낌을 누릴 방법을 공급해 줄 양으로 생산업과 서비스업이 수없이 생겨났고 그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수도 엄청납니다. 과학기술과 응용과학 역시 날로 커져 가고있는 감각적 향락과 안일에 대한 수요를 채우는 일에 온통 매달리다시피 하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지경입니다.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느낌이 따릅니다. 그러므로 느낌에 대한 마음챙김의 정관은 육체적, 정신적인 존재의 전체성을 파악하기 위한 중요한 대목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경험되어지는 모든 것은 신체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인 안, 이, 비, 설, 신의 오근과 마음, 곧 의근, 이 여섯 개의 감각의 문을 통해서 만납니다. 이 여섯 가지 감각의 문에 어떤 대상이 접촉되면 신체와 마음의 현상이 일어나 곧 느낌이 발생합니다.

 

 

 

그리고는 무지의 어둠 속에 습관적인 무의식적 충동으로 좋거나 싫은 느낌, 혹은 좋지도 싫지도 않은 중립의 느낌 등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현상은 의식의 표면에 어느 정도 명확하게 들어날 때까지 오랜 시간 동안 반복됩니다. 그리고는 감정이 개입되어 격렬한 긴장으로 발전하여 문제로 몰아갑니다.

 

 

 

그러나 내부의 느낌을 알아차려 마음챙김하는 위빠싸나 참선 수행자는 위험한 격렬의 긴장이 오기 전에 습관적인 무의식의 충동을 분명하게 알아차려 미연에 방지하고 평온에 머물 수 있습니다.

 

 

 

육체적인 측면의 느낌은 우리의 내부에서 마음의 문제를 일으키는 현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며 경험케 해주므로 느낌에 대한 마음챙김의 정관은 매우 중요합니다.

 

 

 

불교 심리학에서는 느낌(vedana)을 즐겁게, 괴롭게, 또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게 감수되는 순수 감각 현상으로 봅니다. 따라서 느낌은 맨 감각이고 이러한 기본적 느낌에서 정서의 흐름인 감정이 일어납니다. 그 감정은 또 느낌에다가 ‘좋다, 싫다’ 그밖에 이런 저런 생각들을 즉 욕망, 사랑, 미움, 걱정, 두려움 또는 왜곡된 견해 따위가 생겨나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느낌이 사람이라는 존재물을 구성하고 있는 오온(pancchakkhanda) 가운데 수온에 해당됩니다. 정서의 흐름의 결과 상온이 일어나고 분별식의 작용으로 발생한 성향, 의지 등은 행온에 속합니다. 따라서 이것들은 수온과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느낌은 네 가지 정신더미 중 하나인데 식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이 수온, 상온, 행온이 함께 일어납니다.

 

또한 느낌은 육근과 대상인 육경, 육식 이들 세 가지 요소가 만날 때에는 언제나 생겨납니다. 불교심리학에서 말하는 촉이 바로 이 셋의 만남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 중에서 식의 존재 여부가 촉의 결정 요인이 되므로 이는 어디까지나 정신적 과정이지 육체적 과정은 아닙니다.

 

 

 

이것은 12연기에서 촉이 원인이 되어 느낌이 일어나는(phassa paccaya vedana) 연결고리에 해당됩니다. 연이어 감정이 따라 일어나면 느낌이 원인이 되어 갈애가 일어나는(vedana paccaya tanha) 연결고리를 만들게 됩니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여섯 가지 감각의 대상 가운데 눈, 귀, 코, 혀, 몸에 닿아서 생겨난 맨 느낌은 항상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다는 점입니다. 이들 네 가지 감각적 인식에 관한 한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이 반드시 뒤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런 느낌이 따를 때에는 뒤이은 인식과정 상의 추가단계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느낌 그 자체는 따로 떼어 본다면 그것은 즐겁다, 괴롭다 또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다고 알게되는 순수한 감각현상일 뿐입니다.

 

 

 

이 기본적 느낌에 달라붙는 감정적, 실용적, 도덕적, 정신적 가치 등은 그 느낌과 관련되어 바로 뒤따라 일어나는 다른 정신적 요소들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입니다. 굳이 분류하자면 이들은 상온과 행온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들 느낌과 같이 일어나는 이 정신 요소들의 작용과 특성에 따라 느낌이 좋거나 나쁘게, 고결하거나, 저열하게, 업을 짖거나 짖지 않게 됩니다. 느낌은 식의 작용이 강하지 않을 때에는 대개 맨 감각 단계에서 그치고 그 이상은 진행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챙겨 깊은 정관이 이루어지면 괴로움으로 진행되지 않고 맨느낌에만 머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수행의 유용성으로 이어지는 근간이 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느낌이야말로 해탈의 길에서 주요한 관건이 되는 요소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특히 느낌이 선하지 못한 감정으로 바뀌려 할 때에는 반드시 놓치지 말고 마음챙김 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느낌에 대한 정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느낌이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에 그 느낌을 마음챙겨 알아차리고 이것은 즐거운 느낌, 이것은 괴로운 느낌, 이것은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인가를 뚜렷이 구별해 내는 일입니다. 뒤섞인 느낌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사띠빠타나(정관) 참선 공부에서 느낌에 '나' 또는 '나의 것' 따위의 관념이 끼어 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특히 중요합니다. 아울러 '나는 기분이 참 좋다' '난 정말 행복해'라는 식으로 느낌의 소유자가 된 듯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나는 괴로워' '난 정말 불행해'라는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하 사띠빠타나 숫따 (maha-satipatthana sutta, 대염처경)에 서술된 느낌에 대한 정관 참선 공부에 대한 것을 살펴봅시다.

 

 

 

어느 때 목수 빤짜깡가가 우다이 테라(장로)를 뵈러 갔다. 가서는 공손히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그리고는 우다이 테라에게 여쭈었다.

 

"우다이 테라시여 세존께서는 몇 가지의 느낌에 대하여 설하셨습니까?"
"오, 목수여, 세존께서는 세 가지 느낌에 대하여 설하셨으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입니다."

 

 

 

이 말을 듣고 목수 빤짜깡가는 말했다.

 

"우다이 테라이시여, 참으로 세존께서 가르치신 것은 세 가지가 아닙니다. 세존께서 가르치신 것은 두 가지 입니다. 즉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입니다. 테라시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적정하고도 오묘한 종류의 즐거움이라고 세존께서는 설하셨습니다."

 

 

 

아난다 테라가 우다이 테라와 빤짜깡가 목수 사이에 있었던 이 논쟁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 세존께 우다이 테라와 목수 빤짜깡가 사이에 있었던 이 논쟁의 전말을 세존께 아뢰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목수 빤짜깡가는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우다이 빅쿠의 주장은 옳았다. 마찬가지로 우다이 비구가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목수 빤짜깡가의 주장은 옳았다. 나는 방편에 따라, 느낌들을 때로는 두 가지로 설했고, 때로는 세 가지로 설했으며, 때로는, 때로는 여섯 가지로, 열 여덟 가지로, 서른 여섯 가지로, 때로는 백 여덟 가지로 설하기도 했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나는 방편에 따라서 여러 가지 법을 설했느니라"

 

 

 

"아난다여, 여기 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이 있나니 그 다섯은 무엇인가? '눈'으로 인식되는 형상들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니라. '귀'로 인식되는 소리들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니라. '코'로 인식되는 냄새들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니라. '혀'로 인식되는 맛들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니라. '몸'으로 인식되는 닿음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니라."

 

 

 

"아난다여 이것들이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이니라. 이 다섯 가지 가닥의 감각적 욕망에 의지하여 생겨나는 즐거움(sukkha)와 기쁨(somanassa)을 관능적 쾌락(kamasukkha)이라 부른다. 그런데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다 말한다면, 나는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것보다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다여, 여기 한 빅쿠가 있어 감각적 욕망을 아주 멀리하고, 도덕적으로 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 법(불선법)을 멀리한 채, 고찰과 추론적 사유를 지니며, 멀리 떨쳐버리는데서 오는 희열과 즐거움이 있는 초선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참으로 그 관능적 즐거움보다 한결 수승한 즐거움이니라."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다 말한다면, 나는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것보다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여기 한 빅쿠가 있어 고찰과 추론적 사유가 가라앉으면서 제2선에 들어 머무는 바, 그 선정에는 확신이 있고, 그리고 생각 고찰과 추론적 사유을 놓아 버리고 마음이 집중되어 사마디(samadhi, 삼매)에서 생기는 희열과 즐거움이 있다. 이것이 참으로 그 즐거움보다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다 말한다면, 나는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것보다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여기 한 빅쿠가 있어 희열마저 차츰 사라져 버리면서 완전한 알아차림으로 평온에 머문다. 안으로는 즐거움을 느끼면서, 성자들이 일컫는 '평온한 채로 마음챙겨 즐거움에 머문다'고 하는 제3선에 머문다. 이것이 참으로 그 즐거움보다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다 말한다면, 나는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것보다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여기 한 빅쿠가 있어 즐거움을 버렸고 괴로움도 버렸으며, 이미 그 이전에 기쁨과 슬픔은 사라져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가운데 평온에 기인한 마음 챙김의 청정함이 있는 제4선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참으로 비구들이여, 그 즐거움보다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니라."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다 말한다면, 나는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것보다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여기 비구가 있어 일체 물질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초월했으며, 장애 (patigha, 걸리는 것 또는 저항하는 것으로 윤리적인 면에서 진심을 의미)도 사라졌고, 그밖에 다양한 인식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채로 '무한하구나, 허공은'하며 공무변처 (akasancayatana)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참으로 그 즐거움보다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다 말한다면, 나는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것보다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여기 한 빅쿠가 있어 일체 공무변처를 초월하여 '무한하구나 식은'하며 식무변처 (vinnanacayatana)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참으로 그 즐거움보다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니라."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다 말한다면, 나는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것보다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여기 한 빅쿠가 있어 일체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없구나 아무 것도'하며 무소유처 (akincannayatana)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참으로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아난다여, 만일 어떤자들이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다 말한다면, 나는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것보다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여기 한 빅쿠가 있어 일체 무소유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비상비비상처(nevasannanasannayatana, 인식이 있기도 하고 있지 않기도 한 경계)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참으로 그 즐거움보다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다 말한다면, 나는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것보다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여기 한 빅쿠가 있어 일체 비상비비상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모든 인식의 그침에 머문다. 이것이 참으로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최상승의 즐거움이니라."

 

 

 

세존께서는 방편에 따라 느낌들을 두가지로, 때로는 세가지로, 다섯가지로, 여섯가지로, 열여덟 가지로, 서른여섯 가지로, 때로는 백여덟 가지로 설하셨습니다.

 

가) 두 가지 느낌:

 

육체적인 느낌
심적인 느낌

 

 

 

나) 세 가지 느낌: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

 

 

 

다) 다섯 가지 느낌:

 

즐거움의 기능 (sukkha-indriya)
괴로움의 기능 (dukkha-indriya)
기쁨의 기능 (somanassa-indriya)
슬픔의 기능 (domanassa-indriya)
평온의 기능 (uppekkha-indriya)

 

 

 

라) 여섯 가지 느낌

 

눈과 닿아서 일어난 느낌
귀와 닿아서 일어난 느낌
코와 닿아서 일어난 느낌
혀와 닿아서 일어난 느낌
몸과 닿아서 일어난 느낌
마음과 닿아서 일어난 느낌

 

 

 

마) 열 여덟 가지 느낌

 

기쁨으로 대상에 다가가는 위의 여섯 가지 느낌
슬픔으로 대상에 다가가는 위의 여섯 가지 느낌
평온으로 대상에 다가가는 위의 여섯 가지 느낌

 

 

 

바) 서른 여섯 가지 느낌

 

세속생활을 바탕으로 하는 여섯 가지 기쁨의 느낌
출가생활을 바탕으로 하는 여섯 가지 기쁨의 느낌
세속생활을 바탕으로 하는 여섯 가지 슬픔의 느낌
출가생활을 바탕으로 하는 여섯 가지 슬픔의 느낌
세속생활을 바탕으로 하는 여섯 가지 평온의 느낌
출가생활을 바탕으로 하는 여섯 가지 평온의 느낌

 

 

 

사) 백 여덟가지의 느낌

 

과거의 서른 여섯 가지의 느낌
현재의 서른 여섯 가지의 느낌
미래의 서른 여섯 가지의 느낌

 


다시 마하-사띠빠타나 숫따(대염처경)에 의하면,

 

"빅쿠들이여, 세간적 희열이 있고, 출세간적 희열이 있으며, 그 보다 더 큰 출세간적 희열이 또 있다. 세간적 즐거움이 있고, 출세간적 즐거움이 있고, 그보다 더 큰 출세간적 즐거움이 있다. 세간적 평온(uppekkha)이 있고, 출세간적 평온이 있고, 그보다 더 큰 출세간적 평온이 있다. 세간적 해탈(vimokkha)이 있고, 출세간적 해탈이 있으며, 그보다 더 큰 출세간적 해탈이 있다.

 

 

 

빅쿠들이여, 어떤 것이 세간적 희열인가?

 

"아난다여, 여기 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이 있나니 그 다섯은 무엇인가? '눈'으로 인식되는 형상들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니라. '귀'로 인식되는 소리들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니라. '코'로 인식되는 냄새들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니라. '혀'로 인식되는 맛들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니라. '몸'으로 인식되는 닿음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니라.

 

 

 

빅쿠들이여, 참으로 이들이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이다. 이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에 의하여 생겨나는 희열, 즐거움을 일컬어 세간적 희열, 세간적 즐거움이라 한다,

 

 

 

빅쿠들이여, 어떤 것이 출세간적 희열인가? 여기 한 빅쿠가 있어,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멀리하고, 그것의 향상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법을 멀리한 채, 고찰과 추론적 사유를 수반하며, 멀리 떨쳐버린 데서 오는 희열과 즐거움이 있는 초선에 머문다. 또 고찰과 추론적 사유가 가라앉으며 내면적 확신이 있고, 고찰과 추론적 사유가 붙지 않는 마음의 집중이 있으며, 사마디(samadhi,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에 머문다.

 

 

 

빅쿠들이여, 이것을 일컬어 출세간적 희열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이 그보다 더 큰 출세간적 희열인가? 번뇌를 완전히 말려버린 빅쿠가 있어,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자신의 마음을 관찰할 때, 어리석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자신의 마음을 관찰할 때 희열이 생긴다. 이를 일컬어 더 큰 출세간적 희열이라 한다.

 

 

 

빅쿠들이여, 어떤 것이 출세간적 즐거움인가? 여기 한 빅쿠가 있어, 감각적 욕망을 멀리하고, 그것의 향상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법을 멀리한 채, 고찰과 추론적 사유를 수반하며, 멀리 떨쳐버린 데서 오는 희열과 즐거움이 있는 초선에 들어 머문다. 또 고찰과 추론적 사유가 붙지 않는 마음의 집중이 있으며, 사마디(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에 머문다. 또 그는 희열마저 차츰 사라져버리면서, 완전한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니고 평온에 머문다. 안으로는 즐거움을 느끼면서, 성자들이 일컫는 바 '평온한 채로 마음챙겨 즐거움에 머문다' 빅쿠들이여, 이를 일컬어 출세간적 즐거움이라 한다.

 

 

 

빅쿠들이여, 어떤 것이 더 큰 출세간적 즐거움인가? 번뇌를 완전히 말려버린 빅쿠가 있어,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자신의 마음을 관찰할 때, 어리석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자신의 마음을 관찰할 때 즐거움과 기쁨이 생기나니 이를 일컬어 더 큰 출세간적 즐거움이라 한다.

 

 

 

빅쿠들이여, 어떤 것이 세간적 평온인가?

 

빅쿠들이여, 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이 있나니 그 다섯은 무엇인가? '눈'으로 인식되는 형상들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니라. '귀'로 인식되는 소리들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니라.

 

 

 

'코'로 인식되는 냄새들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니라. '혀'로 인식되는 맛들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니라. '몸'으로 인식되는 닿음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니라. 이 다섯 가닥의 욕망에 연하여 일어난, 그 평온을 일컬어 세간적 평온이라 한다.

 

 

 

빅쿠들이여, 어떤 것이 출세간적 평온인가? 여기 한 빅쿠가 있어 즐거움과 괴로움을 버리면서 그리고 이미 그 이전에 기쁨과 슬픔이 사라져서, 빅쿠는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으며, 마음챙김이 평온에 기인하여 극히 청정한 제4선에 머문다 이를 일컫어 출세간적 평온이라 한다.

 

 

 

빅쿠들이여, 어떤 것이 더 큰 출세간적 평온인가? 번뇌를 완전히 말려버린 비구가 있어,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자신의 마음을 관찰할 때, 성냄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자신의 마음을 관찰할 때 평온이 생기나니 이를 일컬어 더 출세간적 평온이라 한다.

 

 

 

빅쿠들이여, 어떤 것이 세간적 해탈인가? 물질(색)과 관련된 해탈을 세간적 해탈이라 한다.

 

빅쿠들이여, 어떤 것이 더 큰 출세간적 해탈인가? 번뇌를 완전히 말려버린 한 빅쿠가 있어,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자신의 마음을 관찰할 때, 성냄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자신의 마음을 관찰할 때 해탈이 생기나니 이를 일컬어 더 출세간적 해탈이라 한다."

 

 

 

어느 때 여러 빅쿠들이 세존을 친견하러왔다. 공손히 절을 올리고는 한 곁에 앉았다. 그리고는 세존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느낌이란 무엇입니까? 느낌의 일어남이란 무엇입니까, 무엇이 느낌을 일어나게 합니까? 느낌의 그침은 무엇입니까, 느낌에 있어 달콤함이란 무엇입니까, 느낌에 있어 위험함이란 무엇입니까, 그로부터 벗어남이란 무엇입니까?"

 

 

 

"빅쿠들이여, 이 세 가지가 느낌이나니, 즐거움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다. 이들을 느낌이라 한다. 촉이 일어남으로서 느낌이 일어난다. 갈애가 곧 느낌의 일어남에로 이끄는 길이니라. 촉이 그치면 느낌이 그친다. '여덟 가지 성서로운 길'이 '느낌의 그침에 이르는 길'이니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노력, 바른 마음챙김, 바른 선정이 그것이다.

 

 

 

느낌으로 인해서 즐거움과 기쁨이 생기나니, 이것이 느낌의 달콤함이다. 느낌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기 마련이니, 이것이 느낌에 있어 위험함이다. 느낌에 대한 욕탐을 제어하고 끊어 버리면, 이것이 느낌에서 벗어남이다.

 

 

 

빅쿠들이여, 느낌에는 세 가지가 있나니, 참으로 어떤 사마나(출가 수행자)이든 브라흐만이든 이 세 가지 느낌들의 일어남과 사라짐, 달콤함과 위험함,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면 그가 비록 사마나 가운데 있어도 사마나라 할 수 없으며, 브라흐만 가운데 있어도 브라흐만이라 할 수 없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은 비록 존경은 받지만 참 사마나의 길과 참 브라흐만의 길을 지금 여기 스스로 알지도 못하고 실현시키지도 못하면서 그저 사마나와 브라흐마가 되어 살아갈 뿐이다.

 

 

 

그러나 참으로 어떤 사마나이든 브라흐마이든 이 세 가지 느낌들의 일어남과 사라짐, 달콤함과 위험함,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안다면 그는 사마나 가운데 사마나이요 브라흐마 가운데 브라흐마이라 할 것이다. 그들은 여기서 바로 알고 실현시켜 참 사마나와 참 브라흐마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또 다시 세존께서는

 

"빅쿠들이여, 느낌을 알아야 하며, 느낌들의 연기를 알아야 하고, 느낌의 다양함을 알아야하며, 느낌들이 익어 맺는 결실을 알아야하며, 느낌들의 그침을 알아야하며, 느낌들의 그침에 이르는 길을 알아야한다. 어떤 인연으로 그렇게 설했는가?

 

 

 

빅쿠들이여, 무엇이 느낌인가? 이 세 가지가 있나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니라.

 

어떤 것이 느낌들을 일어나도록 조건 지우는가? 촉이 느낌들을 일어나도록 조건 지운다.

 

어떤 것이 느낌들의 다양함인가? 세간적 즐거움이 있고, 출세간적 즐거움이 있다. 세간적 괴로움이 있고 출세간적 괴로움이 있다. 세간적인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있고 출세간적인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있나니 이를 일컬어 느낌의 다양함이라 한다.

 

 

 

어떤 것이 느낌들이 익어 맺는 결실인가? 이 느낌 또는 저 느낌에서 생긴 개아적 존재가 그 결실이다.

 

어떤 것이 느낌의 그침인가? 촉의 그침이 느낌의 그침이다. 그리고 이 성스러운 여덟 가지 길(8 정도)이 느낌의 그침에 이르는 길이니 즉,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노력,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사마디(삼매)이다."

 

 

 

여기서 '개아적 존재'란 '나'가 있다고 하는 견해이니, 그것에는 20가지의 나의 견해(sakkaya-ditthi)가 있습니다.

 

색 ,수, 상, 행, 식이 곧 자아이다
자아가 색 ,수, 상, 행, 식을 소유한다
자아 안에 색 ,수, 상, 행, 식이 있다
색 ,수, 상, 행, 식 안에 자아가 있다

 

이것들은 잘못된 견해이며, 이 잘못된 견해는 소따빤나 (수다원) 도와 과(magga, phala)를 성취했을 때 완전히 물러갑니다.

 

 

 

인간을 서술하는 불교의 가장 두드러진 관점은 '나'라는 고정 불변적인 실재하는 본체에 대한 부정에 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기독교인이든, 회교인이든, 힌두교인이든, 어떤 사마니즘을 받드는 사람이든, 혹은 무신론자이든 자기 내부에 지속적인 동일자(同一者)로서의, 고정 불변의 실재하는 본체로서의 '나'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습관적이고, 관념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철학적인 면, 종교적인 면에서 우리가 무엇을 진리로써 받아들이든지 실제로는 '나는 존재했고, 지금 현재 존재하고 있으며, 또 존재할 것이다'라고 습관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무비판적으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 가지 불선성향이란,

 

즐거운 느낌 (sukkha-vedana)에는 탐욕의 불선성향 (raga-anusaya)이 반복해서 일어남.
괴로운 느낌 (sukkha-vedana)에는 진심의 불선성향 (patigha-anusaya)이 반복해서 일어남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 (uppekkha-vedana)에는 무지의 불선성향 (avija-anusaya)이 반복해서 일어남.

 

즐거운 느낌이 일어날 때 수행자가 그것을 잘 마음챙김 하지 않으면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는 전 수행 과정 동안 그것을 너무나 즐기기 때문에 탐욕에 휘말리게 될 것입니다.

 

 

 

괴로운 느낌이 일어날 때 수행자가 그것을 잘 마음챙김 하지 않으면 괴로운 느낌이 일어난 전 수행 과정 동안 그가 괴로운 느낌을 관용할 수 없기 때문에 진심으로 인해 마음이 동요되므로 성냄, 우울, 슬픔 등에 휘말리게 될 것입니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날 때 수행자가 그것을 잘 마음챙김 하지 않으면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나는 전 수행 과정 동안, 그것이 모호하기 때문에 무지에 의해 무기와 나태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이 부분을 경전 속에서 살펴보면,

 

"빅쿠들이여, 즐거움을 느낄 때 탐하려는 고질적 잠재성향을 버려야 한다. 괴로움을 느낄 때 저항, 염오하려고 하는 고질적 잠재성향을 버려야 한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의 경우 무지해 지려는 고질적 잠재성향을 버려야 한다.

 

 

 

빅쿠가 즐거운 느낌을 대하여 탐하려는 고질적 잠재 성향을 버렸고, 괴로운 느낌을 대하여 저항,염오하려는 잠재 성향을 버렸으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대하여 무지해 지려는 잠재 성향을 버렸다면, 그 때 그는 고질적 잠재 성향에서 벗어나 올바로 보는 사람이라 불린다. 그는 갈애를 끊었고, 족쇄를 풀어 버렸으며, 아만을 철저히 꿰뚫어 보아 고를 끝낸 것이다"

 

 

 

"즐거움을 느끼면서도 느낌의 본성을 보지 못한다면 그는 탐욕에 마음이 쏠려 해탈을 얻지 못하리라. 괴로움을 느끼면서도 느낌의 본성은 알지 못한다면 그는 미움에 마음이 쏠려 해탈을 얻지 못하니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그 것 또한 맛들여 매달린다면, 그는 결코 고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리라.

 

 

 

즐거운 느낌들을 괴로움으로 볼 줄 알아야 하며, 괴로운 느낌들을 가시로 볼 줄 알아야 하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들을 무상한 것으로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사람을 바로 보는 사람이라 불린다. 그는 갈애를 끊었고, 족쇄를 풀었으며, 아만을 철저히 꿰뚫어 보아 고를 끝낸 것이다.

 

 

 

행복에서 고통을 읽어내며 고통스런 느낌을 가시처럼 여기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저 평화로운 느낌에서 무상을 인식하는 사람, 이들 느낌들을 충분히 이해한 빅쿠야말로 참 안목을 지닌 자이다. 느낌을 꿰뚫어 보았기에 그는 바로 이 생에서 번뇌가 다하여 지혜가 무르익고 법의 길에 확고하여 언젠가 수명이 다해서 몸이 무너질 때면 어떤 헤아림이나 개념으로도 그를 가늠할 길은 없을 것이다."

 

 

 

또한 세존께서는 수행을 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별을 명확하게 밝히셨습니다.

 

"빅쿠들이여, 법을 배우지 못한 범부도 즐거움의 느낌, 괴로움의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느낀다. 마찬가지로 법을 잘 배운 성서로운 제자도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느낀다. 그러면 잘 배운 성서로운 제자와 배우지 못한 범부 사이에는 어떤 구별이 있으며, 어떤 다른 점이 있으며, 어떤 차이가 있는가?

 

 

 

법을 배우지 못한 범부는 육체적인 괴로움을 겪게되면,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정신적 괴로움으로까지 연장되어, 근심하고, 상심하며, 슬퍼하고, 가슴을 치며, 울부짖고 광란한다. 결국 그는 이중으로 괴로운 느낌을 겪고있는 것이다. 즉 육체적 괴로움뿐만 아니라 정신적 괴로움까지 겪고 있다.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화살을 맞고, 연이어 두 번째 화살을 또 다시 맞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 사람은 두 화살 때문에 오는 괴로움을 모두 다 겪을 것이다.

 

 

 

이와 같이 빅쿠들이여, 법을 배우지 못한 범부는 육체적으로 괴로운 느낌을 겪을 때, 근심하고, 상심하고, 슬퍼하고, 가슴을 치고, 울부짖고, 광란한다. 그래서 이중으로 괴로운 느낌을 겪는다. 즉 육체적 느낌과 정신적 느낌이다.

 

 

 

괴로운 느낌을 접하게되면, 그는 그것에 저항한다. 그처럼 괴로운 느낌에 저항하는 그에게는 그 괴로운 느낌에 저항하려드는 고질적 잠재성향이 마음속에 자리잡게된다. 그 괴로운 느낌에 밀려 이제 그는 감각적 즐거움을 누리려는 쪽으로 나아가게 된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는가?

 

 

 

빅쿠들이여, 배우지 못한 범부는 감각적 즐거움을 누리는 것 말고는 그 괴로운 느낌으로부터 벗어나는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감각적 즐거움을 누리려는 사람에겐 즐거운 느낌을 갈망하려드는 고질적 잠재성향이 마음 속에 자리잡게 된다. 그는 그러한 느낌들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그리고 이러한 느낌들의 달콤함과 위험함, 그리고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한다.

 

 

 

이처럼 느낌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그리고 느낌들에 수반하는 달콤함과 위험함을, 그리고 느낌으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에겐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관해 무지해지려는 고질적 잠재성향이 자리잡게 된다. 그는 느낌에 매인 사람으로서 그 느낌을 느낀다. 이러한 사람을 일컬어 태어남, 늙음, 죽음, 탄식, 근심, 괴로움, 슬픔, 절망에 매인 법을 배우지 못한 범부라 한다. 참으로 그는 괴로움에 매여있다.

 

 

 

빅쿠들이여, 그러나 법을 잘 배운 제자는 육체적으로 괴로운 느낌을 겪더라도 근심하지 않고, 상심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가슴치지 않고, 울부짖지 않고, 광란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한 가지 느낌, 즉 육체적 괴로운 느낌만을 경험할 뿐 결코 정신적 괴로운 느낌은 겪지 않는다. 마치 어떤 사람이 화살에 맞았지만 그 첫 번째 화살에 연이은 두 번 째 화살은 맞지 않는 것과 같다.

 

 

 

괴로운 느낌에 접했다해서 그는 그것에 저항하고 분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에겐 그 괴로운 느낌에 저항하는 고질적 잠재성향이 마음속에 자리잡지 않는다. 그 괴로운 느낌에 밀려 감각적 즐거움을 누리는 쪽으로 나아가지 않나니, 왜 그런가?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감각적 즐거움을 누리는 것 말고도 괴로운 느낌들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즐거운 느낌을 갈망하는 고질적 잠재 성향이 자리잡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감각적 즐거움의 느낌들의 일어남과 사라짐 그리고 이들 느낌들의 달콤함과 위험함, 그리고 그 느낌으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안다.

 

 

 

그래서 그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관해 무지해지려는 고질적 잠재성향이 마음속에 자리잡지 않는다. 그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할 때 그는 그 각각의 느낌에 매이지 않은 사람으로서 그것을 경험한다.

 

 

 

빅쿠들이여, 빅쿠가 이처럼 마음챙겨 분명히 알아차리며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며 머무는 중에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면 그는 이렇게 안다. 즉 '지금 나에게 즐거운 느낌이 일어났다. 이것은 조건 지어진 것이다. 조건 지워지지 않은 것이 아니다.

 

 

 

무엇에 의해 조건 지워졌는가? 바로 이 몸에 의해 조건 지워졌다. 그런데 이 몸은 진실로 무상하며, 요소들로 형성되어진 것이며 조건 지워져 일어나는 것이다. 이렇듯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고, 조건 지워져 일어나는 것인 몸에 의해 조건 지워진 이 즐거운 느낌이 어찌 영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몸에 대해 그리고 즐거운 느낌에 대해 무상을 관하며 머무르고, 사라짐을 관하며 머무르고, 초연함을 관하며 머무르고, 놓아버림을 관하며 머무른다. 이렇게 즐거운 느낌에 대해 무상을 관하며 머무르고, 사라짐을 관하며 머무르고, 초연함을 관하며 머무르고, 그침을 관하며 머무르고, 놓아버림을 관하며 머무는 그에게서 몸에 대한 그리고 즐거운 느낌에 대한 갈망의 고질적 잠재성향이 사라진다.

 

 

 

빅쿠가 이처럼 마음챙겨 분명히 알아차리며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며 머무는 중에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면 그는 이렇게 안다. 즉 '지금 나에게 괴로운 느낌이 일어났다. 이것은 조건 지어진 것이다. 조건 지워지지 않은 것이 아니다.

 

 

 

무엇에 의해 조건 지워졌는가? 바로 이 몸에 의해 조건 지워졌다. 그런데 이 몸은 진실로 무상하며, 요소들로 형성되어진 것이며 연기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이렇듯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고, 조건 지워져 일어나는 것인 몸에 의해 조건 지워진 이 괴로운 느낌이 어찌 영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몸에 대해 그리고 괴로운 느낌에 대해 무상을 관하며 머무르고, 사라짐을 관하며 머무르고, 초연함을 관하며 머무르고, 놓아버림을 관하며 머무른다. 이렇게 괴로운 느낌에 대해 무상을 관하며 머무르고, 사라짐을 관하며 머무르고, 초연함을 관하며 머무르고, 그침을 관하며 머무르고, 놓아버림을 관하며 머무는 그에게서 몸에 대한 그리고 괴로운 느낌에 대한 저항하려는 고질적 잠재성향이 사라진다.

 

 

 

빅쿠가 이처럼 마음챙겨 분명히 알아차리며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며 머무는 중에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나면 그는 이렇게 안다. 즉 '지금 나에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났다. 이것은 조건 지어진 것이다. 조건 지워지지 않은 것이 아니다.

 

 

 

무엇에 의해 조건 지워졌는가? 바로 이 몸에 의해 조건 지워졌다. 그런데 이 몸은 진실로 무상하며, 요소들로 형성되어진 것이며, 조건 지워져 일어나는 것이다. 이렇듯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고, 연기적으로 일어나는 것인 몸에 의해 조건 지워진 이 즐거운 느낌이 어찌 영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몸에 대해 그리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 대해 무상을 관하며 머무르고, 사라짐을 관하며 머무르고, 초연함을 관하며 머무르고, 놓아버림을 관하며 머무른다. 이렇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 대해 무상을 관하며 머무르고, 사라짐을 관하며 머무르고, 초연함을 관하며 머무르고, 그침을 관하며 머무르고, 놓아버림을 관하며 머무는 그에게서 몸에 대한 그리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 대한 무지의 고질적 잠재성향이 사라진다.

 

 

 

이렇게 이들 세 느낌들은 무상한 것이요, 요소들로 형성된 것이며, 조건 지워져 일어나는 것이니 무너지기 마련이며, 사라지기 마련이며, 열정이 식기 마련이며 그치기 마련이다. 또 이 세 가지 느낌들은 촉에서 생긴 것이며, 촉에 뿌리 박고 있으며, 촉을 원인으로 하며, 촉에 의해 조건 지워졌다. 모든 조건 지워진 현상은 무상한 것이다. 조건지워진 것들은 무너지기 마련이며, 사라지기 마련이며, 열정이 식기 마련이며, 그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느껴진 것은 무엇이든지 괴로운 것이다.

 

 

 

그러한 모든 조건지워진 것들의 순차적인 그침이 있다. 초선에 들면 말이 그치며, 2선에 들면 고찰과 추론적 사유가 그치며, 3선에 들면 희열이 그치며, 4선에 들면 입출식이 그치며, 공무변처에 들면 물질에 대한 인식이 그치며, 식무변처에 들면 공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그치며, 무소유처에 들면 식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그치며, 비상비비상처에 들면 무소유처에 대한 인식이 그친다. 멸진정에 들면 인식과 느낌이 그친다. 그래서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서 탐이 그치고, 성냄이 그치고, 미망이 그친다."

 

 

 

미혹(분별된 마음)으로 말미암아 느낌들의 참 성품들이 가려져 느낌들을 즐기고, 괴로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느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느낌에 대한 통찰을 얻게되고, 느낌에 대해 초연하게되어 집착 없이 해탈로 나아가게 됩니다. 느낌의 일어남 등을 완전히 통찰하지 못하면 마침내 윤회의 감옥 속에 갇히게 됩니다. 그러한 무명이 업 형성의 한 조건이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마음에 대한 정관

 

마음의 양식 그리고 정신적인 과정들을 인지한다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로부터 감각대상에 대한 생각이 일어났을 때 '생각' '생각'하면서 마음이 따라가서 꿰뚫어 보듯이 그것을 마음챙김함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마음이란, 의식에 어떤 정신적 요소가 더해진 것으로서, 어떤 의식과 더불어서 심소(cetasika)라 부르는, 사랑, 미움, 성냄, 혐오, 공포, 두려움, 시기, 질투 등과 같은 정신적 요소가 더해진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는 물질적 과정과 더불어 이와 같은 '마음'이라는 정신적 과정이 있습니다. 비록 보고 만질 수는 없지만,  마음은 우리의 육체보다 보다 직접적으로 우리 자신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음 없이는 그 어떤 존재도 인식할 수도 없고, 그려 볼 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들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 내부의 상황에 대해서 거의 모르고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 우리들은 자신에 대한 것보다는 외부 상황에 대하여 더욱 흥미로워 하고, 더 잘고 있으며, 실제로 어려서부터 성인이 되어서 조차도 계속 대상에 대해서만 공부해 왔고, 또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작 우리 자신의 마음에 대해선 거의 정보를 갖고있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마음대로 우리 마음을 조절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마음은 얼마나 자주 스스로가 원하는 것을 거부하고,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을 일어나게 합니까? 통제가 불가능한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입니까? 

 

마음의 작용은 수 (감각 느낌, vedana), 상 (관념, sanna), 행 (의지, sankhara), 식 (vinnana)의 네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다섯 감관에 대상이 부딪히면,

 

첫 번째는, 의식 작용이 일어납니다. 의식 작용은 무분별한 마음의 작용입니다. 의식은 단순히 현상의 발생을 접촉하여 기록하고 어떤 물질적, 정신적 입력을 수신하는 기능을 담당합니다. 입력된 자료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거나 꼬리표를 달아 분류하지 않고 경험의 원자료를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두 번째 과정인 감각, 느낌은 어떤 자료가 입력되면 감각은 무엇이 일어났다는 신호를 일으킵니다. 입력자료가 아직 평가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감각은 중성으로 남아있으나, 일단 가치가 입력자료에 부착되면 주어진 가치에 따라 기쁨이나 불쾌감 혹은 중립감을 일으킵니다.

 

 

 

세 번째 과정인 관념 인식작용은 재인식의 행위입니다. 마음의 이 작용은 의식이 기록한 것은 무엇이나 검토하고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 과정은 입력되는 자료를 분류, 꼬리표를 붙여서 분별해냅니다. 곧 사량을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는 가치를 부여하게 됩니다.

 

 

 

만약 감각이 즐거움을 느낀다면 지속하고자 하는 갈망이 일어나고, 그 경험을 강화시키려 한다. 만약 불쾌한 감각이라면 그것을 멈추고 제거하려는 마음이 일어난다. 마음은 좋고 싫음을 선택한다. 이것이 네 번째 과정인 의지 작용, 즉 행입니다.

 

 

 

이를테면 귀에 어떤 소리가 들리면, 의식 활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곧바로 그 소리가 긍정이나 부정의 의미로 받아졌다면 인식의 작용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 다음에 감각이 작용합니다.

 

 

 

그래서 만약 그 말이 칭찬의 종류였다면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며, 욕설이었다면 불쾌한 느낌이 일어난다. 즉 심리적 작용이 시작됩니다. 그것이 기쁜 느낌이었다면 그것을 좋아하게 되고 보다 많은 칭찬을 받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불쾌한 느낌이었다면 그 불쾌한 느낌을 실어하고 때로는 성냄으로 나아갑니다.

 

 

 

이들 네 가지 정신적 과정의 작용은 빨리, 섬세하게 일어나서 지나갑니다. 네 가지 정신적 과정이 전광석화와 같이 일어나고, 매우 섬세하게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알아차리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어떤 의지적 활동이 계속 같은 방식으로 오랜 기간 동안 반복될 때, 그리고 이것을 의식의 수준으로 알아차릴 수 있는 분명하고 강력한 도구를 가질 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정신적 네 가지 작용은 알지 못한 채로 지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정의 반응을 제어하기가 힘듭니다.

 

 

 

이 의식의 수준으로 알아차릴 수 있는 분명하고 강력한 도구가 바로, 사띠빠타나, 위빠싸나, 정관 참선 수행인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마음챙김의 정관으로 마음의 상태, 마음의 작용을 정확히 알아차려, 그것이 만일 불선성향을 지닌 것이면 제어하고 조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것의 성품을 확연하게 깨달아 그 뿌리를 잘라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들은 마음에 의하여 마음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그들의 삶 속의 많은 문제들이 '실재'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우리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힘을 얻었을 때, 대부분의 문제들은 우리 자신의 마음에 의하여 만들어짐을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만이 자신의 마음에 대하여 이해하게 되며, 그 마음을 이해해야만 마음이 그들 불선성향을 지닌 불선업, 즉 탐욕, 성냄, 시기,  질투, 공포, 두려움, 슬픔, 통곡, 저주, 분함 등의 부정적인 것들에 반응하는 것이 멈추어 평온으로 가라앉을 것입니다.

 

 

 


법에 대한 정관

 

붓다의 '설법'을 빠알리어로 담마라 일컫습니다. 설법은 한 인격체로서의 붓다가 경험의 연속을 통해 주어지는 하나 또는 일련의 사건들이나 여러 사태들을 언어화된 상징과 용어로 정형화하려는 의도를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붓다께서 담마라는 말을 다음과 같은 다섯가지 용법들로 구분하여 사용하는 것을 보고서 그 용어의 아주 풍부한 의미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질, 본성 (guna)
원인, 조건 (hetu)
진리, 비실체성 (nissatta,,nijiva)
가르침 (desana)
경전, 성전 (pariyatti)

 

 

 

그러나 사념처 정관수행에서 법에 대한 마음챙김의 정관은 앞에서 언급한, 즉 몸에 대한, 느낌에 대한, 마음에 대한 마음챙김의 정관 외의 모든 대상에 대한 마음챙김의 정관을 의미합니다.

 

 

 

수행 안에서 영상, 환영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알아 차리고 '환영', '영상' 혹은 '보임'하며 그것에 마음집중 합니다. 어느 정도 노력하여 수행이 향상되면 여러 가지 빛이 나타나는 현상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럴 때, 어떤 수행자는 처음 경험하는 것이라 불안하고 두렵기도 하여 어찌할지 몰라 당황하는 경향이 있기도 합니다. 또 어떤 수행자는 신기하기도 하고 흥미 있기도 하여 그것에 집착하여 즐기려 하기도 합니다. 혹자는 그것이 수행에 있어서 대단한 경지를 얻은 증표라고 스스로 판단하여 마치 엄청난 법을 성취한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흔히 있습니다.

 

 

 

어떤 경우이던간에 수행을 멈추게 하는 원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직 수행자가 해야할 것은 빛이 나타났음을 알고 '보임' 혹은 '알고 있음'하며 그것에 집중하여 마음챙김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소리가 들렸을 때, 그것을 분명히 알아 차리고는 '들림'하며 마음챙김합니다. 어떤 대상에 접촉되었을 때, 그 접촉된 느낌을 분명히 알아 차리고 '닿음' 하며 닿은 느낌을 마음챙김합니다. 어떤 대상을 볼 때, 그 것을 분명히 알아 차리고 '봄' 하며 그 대상에 마음챙김합니다.

 

 

 

어떤 대상에 집중하여 마음챙김을 하는 동안 시간이 경과하면 마음챙김이 분명하지 않고 흐리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떄 즉시 그것을 분명히 알아 차리고 무엇을 마음챙김하고 있는지 그 대상을 명확하게 확인하여야 합니다.

 

 

 

그 다음 그 대상을 명확하게 알아 차리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 즉 마음챙김하고 있음을 알아 차리는 것 또한 법에 대한 정관입니다. 알아차림의 알아차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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