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도는 방위가 없고,,,,,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6-10-18 / 조회 : 9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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至道는 方位가 없고, 眞理는 言說이 없다. 至道는 方位가 없기 때문에 萬法은 緣에 따라 일어나고, 眞理는 言說이 없기 때문에 百家는 情에 맡겨 구른다. 이를 [眞空妙有인 大用이라] 이르니, 人生은 누구나가 이 眞空妙有인 大用중의 一分子이면서, 되돌아 無限한 大界로 하여금 無盡한 大法輪을 스스럼 없이 굴리며 가는 主人公이다.

 

이렇듯이 萬法의 主將이요 百家의 靈長인 人生은, 어찌된 일이냐, 無明 三毒에 떨어진지 이미 오래이므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앓고 죽는 그물에 걸려들고 말았으니, 이름뿐인 人生으로서 괴로운 바다에 떠도는 天涯의 奇型兒가 되고 말았다.

 

서글픈 일이다. 도대체 사람이란 무엇인가. 主動的인가 被動的인가. 또는 어디서 좆아 왔으며 다시 어디로 향하여 가는가. 흙구덩인가 불구덩인가. 아니면 천당인가 지옥인가. 오는 곳을 모르니 가는 곳인들 어이 알며, 가는 곳을 모르니 머무는 곳인들 어이 알겠는가.

 

참으로 우리 自身을 되돌아 살펴볼 때, 한낱 가죽 주머니로서 이름뿐인 人生이라면 이것은 분명히 실답지 않은 꼭두의 놀음에 지나지 않는 허망한 人生이니, 삶은 삶이 로되 죽음의 삶인지라, 이 또한 허수아비의 삶이 아니고 무엇이랴.

 

迷한 중생들은 自己矛盾의 마음씀이 잘못으로 말미암아 가져오는 八萬四千의 뇌로움속에서 生死想의 幻業만을 엮으며 가니 어찌 여기에 올바른 人生觀인들 밝혀내며 진정한 社會觀인들 세워지랴.

 

대개의 哲學은 입뿌리 위를 벗어나지 못하므로 하여금, 正論은 異說로 말미암아 그 뜻을 못 드러내고, 대개의 宗敎는 마음 밖을 향하여 달리므로 하여금, 正道는 邪道로 말미암아 그 회포를 못 밝혀내니 심히 不幸한 일로서 중생의 갈 길은 어드메인가.

 

이럴진댄 실답지 아니한 人生이라 하여 허망한 꼭두임을 自認하고 사그러짐(滅)만 을 기다릴까보냐. 아니다, 아니다. 허수아비로서인 나의 앞소식에 [비롯도 없고 마침도 없는 참 내]가 버젓이 있으니, 기틀에 응하여 三界를 지어내고, 연에 따라 萬法을 굴리는데, 어찌 人生의 無常만을 設하며 草露의 人生만을 論하리요.

 

보라! 저 바다가 넓고 깊다 하기로서니 思量을 하던가. 안 하기 때문에 온갖 魚類로 더불어 삶을 한가지로 굴리며 간다. 보라! 이 허공이 한없고 끝없기로서니 分別을 짓던가. 안 짓기 때문에 모든 法緣으로 더불어 조화를 한결같이 이루며 온다.

 

人生도 이와 같아서 오로지 뒤바뀐 새김을 여의고 모름지기 엇갈린 판가름을 쓸어내면 [본래의 나의 面目]은 문득 나투나니, 이에 人生은 나의 人生이기에 좋고, 世界는 나의 世界이기에 좋은지라, 비로소 누리는 중생으로 더불어 훌륭한 樂園임을 再認識하지 않겠는가.

 

이러므로 슬기로운 사람은 번드시 山河大地의 出處를 밝혀내면서, 올바로 人間群像의 來處를 캐어내는데 힘을 기울인다. 왜 그런가. 山河大地와 人間群像은 허공으로 더불어서 非一이요 非二이기 때문이니, 이러기에 우리의 앞길은 언제나 無窮하고 永遠할 따름인지라. 나는 이에 人生을 宣言하노라.

 

나는 [人生 本來의 面目]을 되찾기 위하여 煩惱와 塵勞가 全部인 이러한 인생을 거부한다.

나는 [人生 本來의 靈知]를 되찾기 위하여 生老와 病死가 全部인 이러한 인생을 거부한다.

나는 [人生 本來의 平等]을 되찾기 위하여 祈福과 救命이 全部인 이러한 인생을 거부한다.

 

나는 이렇듯이 인생을 宣言하고 끝없는 허공으로 더불어 大道를 行하며 가기 위한 새 出發을 하노니, 어즈버야 人生이란 勇敢하고도 快活한 存在가 아닐까보냐. 이 大道야말로, 불 보살님네의 理念으로 이룩된 藏經에서 밝혀 놓으셨지마는, 이에 특히 금강經과 이 經을 통하여 [한번 뛰어 여래땅에 드는 소식]을 전하셨으니 바로 우리의 生命體라 하겠다.

 

이 經의 主人公은 [유마힐]거사로서 바로 法身大士이시다. 세존의 法을 받들어 모시고 중생제도의 앞장을 서신 그 態度는 너무나 과감하셨다. 계급의 높 낮음을 가리지 않으시고, 곳에 따라 기틀을 꾸미시고 연을 일으키되, 불가사의한 法門을 가로 세로 굴리신 肉身보살로서 만나 뵈옵기 드문 大 善知識이시다. 다행히도 세존과 더불어 같이 出現하시어, 해와 달이 한가지로 빛을 놓으셨으니, 法에 僧俗이 따로 없음을 보이심이실까.

 

法을 設하심에도 지극히 간결하셨으니 듣는 이로 하여금 必要이상의 수고를 덜게 하시고, 뜻을 드심에도 또한 지극히 명료하였으니 배우는 이로 하여금 용이하게 체득을 시키시기로는 이 세간에서 드무신 智辨家이시다. 權道와 正道를 아울러 쓰시되 俗界에 超然하시고, 事와 理를 거두어 쓰시되 法界를 超出하신 大 哲人으로서 뒤 學人들의 大先輩이심에 어찌 異論이 있겠는가.

 

古人도 그 深奧한 法器를 아시고 이르시되 [반야의 無文之門에 진흙소를 채찍질 했고, 眞如의 無言之海에 쇠배를 타셨다] 하였으니, 가히 軒昻하시면서 高潔하신 그 道品에 머리를 숙일 따름이다. 이 經은 主로 生死와 涅槃 및 煩惱와 菩提를 비롯하여 온갖 法의 골수를 드러내신 大乘經典으로서, 거사가 法을 設하시기 위하여 病까지 假借하심은 그 本懷가 不二法門에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三十二보살이 不二法門을 設하신 다음 거사가 一默으로 無言을 하신 것은 大體를 보이심이라 한다면 등왕에게 사자좌를 빌리시고, 향적여래께 향밥을 청하시고, 나계왕의 天宮과 아촉불의 淨土를 역력히 보이시고, 앉은채로 묘희국을 接見하신 것은, 大用을 굴리심이라 하겠다.

 

이렇듯이 거사는 一燈을 켜서 百千燈을 밝히심과 같이, 이 經을 통하시어 至道에 없는 방위를 그대로 나투시고 眞理에 없는 言說을 그대로 전하셨으니, 우리는 이 經을 나침반으로 삼고 航海를 시작하자.

 

그러면, 三千年前의 유마거사의 眞身은 이제 어디에 계신가. 꼭 만나 뵙고자 하는 외고집장이가 있거든 허공을 향하여 한걸음 내어 디디어라. 그곳에는 흰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거사님이 눈을 껌벅이며 계시리라.

 

단기 四三一六년, 불기 二五二六년 三월 一일

白峯 金基秋 謹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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