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비를 만나면 시비를 헤치고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09-10-31 / 조회 : 1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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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비를 만나면 시비를 헤치고
호랑이 만나면 때려 눕혀라
새해 새아침에 만난 선지식-월운 스님(봉선사 조실)





“새로 시작하자.”
선지식(善知識)은 늘 ‘새로 시작하는 것’이 사람 사는 지혜라고 했다. 새해 새 아침에 만난 선지식, 월운(月雲) 봉선사 조실은 “날마다 새로운 자세로 새롭게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교종본찰(敎宗本刹) 봉선사 조실당에는 두 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원래부터 있던 현판은 다경실(茶經室)이다. ‘다로경권(茶爐經卷)’에서 유래한 이 말은 차를 마시며 경을 읽는다는 뜻이니 대강백(大講白)의 처소임을 알게 한다. 이 자리에는 원래 애월재(愛月齋)란 건물이 있었으나 1978년 운허 스님의 퇴로지처(退老之處)로 지어진 것이다. 또 하나 근래에 걸린 현판은 ‘능엄대도량(能嚴大道場)’이다. 봉선사 능엄학림에서 손수 후학을 지도하는 선지식의 거처에 아주 합당한 이름이다. 조실당에 걸린 두 개의 현판은 한국불교의 역경 사업을 주도해 온 스승(운허 스님)과 제자(월운 스님)의 원력이 고스란히 배어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스스로 새로워지려는 노력 절실




“새로 시작하자.”
선지식은 다시 말했다.
“지금 주변을 둘러보라. 이대로 가서 무슨 발전이 있겠는가? 발전이라 말한다고 다 발전은 아니다. 모두가 뒤섞이고 왜곡되고 어지럽다. 무엇보다 지금 승(僧)들이 너무 많은 일을 한다. 근거도 없이 그 범위가 너무 넓어졌다. 별별 것에 다 구색을 맞추고 산다. 실천할 수 있는 것, 실천해야 할 것만으로도 승의 살림살이가 벅찬데 너무 범위가 넓다. 근거도 없이….”

현대사회, 도심으로 내려 온 불교는 아직 그 중심을 잡지 못했다. 인터넷 시대, 휴대폰 시대에 신세대들의 톡톡 튀는 감각을 따라잡기에 역부족이고 노력부족이다. 그런 가운데 불교는 사회적으로 존경의 대상으로 자리 잡기는 커녕 온갖 의혹과 질타의 눈초리를 받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선지식은 그 원인을 “스스로 새로워지려고 노력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절망적이야. 이제 내일모레면 팔순의 나이를 맞을 나 같은 노인네야 절망으로 살 수밖에….” 선지식은 절망을 말하면서도 눈이 빛났다. 절망 속에서 제대로 된 희망이 피어나오기 때문이다. 우리시대 최고의 강백이 절망을 말하는 것은 절망하고자 함이 아니라 희망을 길어 올리고자 함이다. 새해 아침에 희망을 말하는 선지식의 어법(語法)이 절망일 뿐. 희망도 절망도 다 잊어버린 자리에서 세상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오늘날 불교계가 바라보아야 할 양지(陽地)가 어디인가를 깨우쳐 주려는 간절함일 뿐.

역경불사는 부처님 가르침 전하는 근간
“다시 시작해야 해.”
선지식은 또 되풀이 했다. ‘홍법강원(弘法講院)’을 다시 일으키려는 봉선사의 원력은 월초 스님과 운허 스님이 교종본찰로 다져두신 면모를 계승하고자 함이다. “내세에도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고, 한국에 태어나고 싶다”고 했던 운허 스님. 그 까닭은 “역경불사를 계속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한 스승의 큰 원력을 이은 선지식은 사실 강원 보다 ‘더 큰 것’을 원하고 있다. 2007년 10월 22일 저녁, 제주도 약천사 회주실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수덕사 수좌 설정, 前조계종 중앙종회의장 지하, 약천사 회주 혜인, 백양사 유나 지선, 해동선원장 태응 스님 등이 둘러앉은 자리였다. 거기서 선지식은 이렇게 말했다.

“나 말이지요, 낼 모레면 팔순이에요. 언제 죽을지 몰라요.(좌중은 숙연했다) 그런데 이런 늙은이에게 간절한 소원이 있어요. 그것도 세 가지나 되거든요. 들어 보실래요?(좌중은 더욱 수그러들었다) 첫째는, 부처님 신장님들이 신통을 좀 부려서 말이지요. 우리나라 저 잘 나가는 재벌들 꿈에 나타나시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너희들 수입의 10%를 동국역경원 역경불사에 시주하라고 협박을 하는 거예요.(좌중은 웃었지만 이내 숙연해졌다) 두 번째는 뭔고 하니, 염라대왕이 말이지요. 그 명부에서 죽은 사람들이 오면 하나하나 면접을 해가지고, 동국역경원 역경불사 후원금 낸 영수증을 보여 주는 사람은 무조건 극락으로 보내는 겁니다.(다시 좌중은 웃었지만 금방 숙연해졌다) 그리고 세 번째, 이 세 번째가 진짜배기입니다. 역경에 원력을 일으킨 사람을 한 20명 쯤 모아놓고 집중적으로 공부를 시켜서 역경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평생 공부를 했는데 적어도 내가 공부한 것이나 전해주고, 공부하는 방법이나 제대로 전해 주고 싶어요. 그래서 나는 한 5년만 더 살았으면 좋겠는데 어떨지 몰라요.”

자못 숙연한 공기를 깨고 설정 스님이 말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10년 20년은 더 사셔야지요.” 지선 스님이 이었다. “노장님의 원력이 얼마나 간절하신지 고개가 저절로 숙여집니다.” 선지식의 원력은 개인의 것도 한 종단의 것도 아니다. 국가적인 것이다. 고려대장경이 외세의 침입을 극복하려는 국가적 발원에서 조판 되었다면, 오늘날의 역경불사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 이 시대의 언어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전하는 근간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전법(傳法)의 범위는 한 종교로서의 불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지혜와 우리 역사의 방향성을 아우르고 있다.






집중적인 경전 공부 시스템 필요
“지금처럼 공부해서도 안 되고 이렇게 공부시켜서도 안 돼.”
선지식은 이제 역경불사의 기본적인 것은 마무리 된 셈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전산화 작업이 남아 있고 보다 깊은 연구를 통한 심화 과정이 남았다고 했다. 문제는 지금 조계종의 학제로는 공부를 제대로 한 승을 길러내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국가의 교육체계가 한문교육을 소홀히 하는 분위기에서 사회교육을 마친 사람이 승이 되고, 그런 사람이 짧은 행자 교육을 마치고 예비승이 되어 강원(승가대)의 이력을 마치는 구조로는 깊이 있는 공부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집중적인 공부가 필요하고 그를 위해 종단적 뒷받침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중앙승가대에서 공부하는 것이 낫지. 거기는 현대사회의 흐름에 맞춰진 커리큘럼이 있으니까. 그런 체제에서 공부하는 사람과 집중적으로 깊이 공부하는 사람이 구분되어야 해. 인력을 기르는 시스템은 아주 분명해야 해.”

선지식은 “사람으로 태어날 수 없는 존재가 사람으로 태어나 승이 되는 것”이라며 “그렇게 승이 된 사람이 다시 세상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이라 했다. 승이 세상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세상 사람과 달라야 한다. 사람들이 다니기 어려운 길목에 초막을 짓고 수행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 마실 것을 주고 재워 주는 공덕을 베푸는 것이 승의 살림살이라는 것이다. 공부의 과정도 마찬가지. 세상 사람들은 명리를 구하는 공부를 하지만 승은 세상 사람들을 구제하는 공부를 하는 것이다. 역경불사는 세상 사람들에게 익숙한 언어와 문자로 진리의 원음을 전하는 일이다. 선지식은 그 일에 매진했던 스승의 뜻을 이어 한 평생을 역경불사에 매진하고 있는 것이다.

내 문제 내가 해결...주변 사람부터 편케하라
“싹 망하고, 새로 시작돼야 해.”
선지식은 또 다시 말했다. 권력을 노리고 별별 짓을 다하는 사람, 자신의 본분사를 잊고 날뛰는 사람들이 싹 망하고 정말로 순수한 사람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세상이 와야 한다는 것이다. 선지식은 “그런 세상은 자기를 살피는 일에서 비롯된다”고 강조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정신을 가다듬고 ‘관세음보살’ 하고 점심 밥 먹기 전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관세음보살’, 저녁에 잠들기 전에 ‘관세음보살’ 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루 세 번씩만 지극한 마음으로 불보살에게 귀의하며 자신을 다잡으면 스스로 ‘나는 제대로 된 불자인가?’ ‘나는 부처님과의 약속을 잘 지키고 있는가?’ 하며 자신을 살피게 된다는 게 선지식의 가르침이다.

바르게 귀의하는 사람은 가르침을 바르게 받들고 살 수 있다. 스스로 탐욕과 집착에 물들면 그 자리에서 탐착으로 망해버리고(탐착을 훌훌 털어 버리고) 새로 순수해 지라는 것이다. 순수로 귀의하고 순수로 살피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선지식은 “부처님과 나 자신을 묶어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처님은 정각을 얻은 후 “일체 중생이 다 부처건만 망상 집착 때문에 부처인줄 모르고 있어 딱하도다. 내 방편으로 스스로 건져 내어 스스로 부처임을 알게 하리라”고 했다. 중생에서 부처로 가는 길, 거기에는 스스로 부처임을 아는 것과 부처가 되려고 애쓰는 노력이 따라야 한다. 이를 두고 선지식은 “내 문제는 내가 해결 한다는 의지가 필요하고 주변 사람을 편하게 해 주는 것부터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야구 선수가 안타를 치고 나가서 주루(走壘)를 요령껏 해야 하듯 자신의 위치를 잘 파악하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슬기롭게 알아서 행동하라는 비유도 덧붙였다.






본래 맑은 물 더럽히는 물고기는 누구냐?
“신훈본분(新薰本分)을 잘 쓰는 지혜가 필요해.”
선지식은 교리(敎理)와 선리(禪理)를 아우르는 지혜를 기르라고 말했다. 예로부터 선은 부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의 말씀이라 했다. 2006년 가을, 교종본찰 봉선사는 ‘10대 강백 초청 경전대법회’를 10주간 봉행했었다. 그 회상에서 10명의 강백들은 교를 떠난 불교가 있을 수 없고 교에 의지하여 얼마든지 깨우침을 얻을 수 있음을 설파했다.

선지식은 ‘신훈본분’이란 용어(用語)의 뜻을 몰라 쩔쩔매는 기자에게 “신훈본분은 본래 가진 밑천을 새로 손질해 만드는 것”이라 풀어주었다. 흙탕물이 있다고 하자. 흙탕물은 본래 맑은 물과 흙 알갱이가 섞여 혼탁해진 상태다. 본래 맑은 물은 우리의 자성이니 본분이다. 현재 흐린 물은 변화에 의한 뒤섞임이니 번뇌 망상이다. 이를 가라앉히는 노력이 참선이고 간경이다. 본분만 믿고 방치하면 무책임해질 수 있고 신훈에 끌리면 속임수에 얽혀 든다. 이게 중생의 삶이다. 선지식은 본래 맑은 물을 더럽히는 물고기를 한 마리씩(혹은 수 십 마리씩) 기르는 중생들을 위해 “중생이 본래 부처인데 왜 중생이 되었는가를 살피라. 살피고 또 살피면 벗어나는 길이 보일 것이다”고 말했다.

매사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용맹심 길러야
시비해리(是非海裏) 횡신입(橫身入)
표호휘중(豹虎彙中) 자재행(自在行)
선지식의 방에 걸린 액자에 스승 운허 스님이 써 주신 글이 담겨 있다. ‘시비의 바다에 몸을 던지고 들어가서 표범과 호랑이가 득실거리는 가운데서 걸림 없이 행동하라’는 뜻이다. “스승께서 내 기질을 잘 보셨던가 봐. 내가 좀 싸움꾼 기질이 있거든. 이 봉선사를 지키기 위해서도 그랬고. 시비를 피한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범이 있다고 몸을 숨겨도 그 공포가 사라지지 않는다. 시비에 닥치면 시비를 헤치고 살고, 범을 만나면 범을 때려눕히고 살아야 해. 미혹에서 깨달음으로 가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매사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용맹심이 없으면 안 돼.” 스승의 유지를 풀이해 준 선지식은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이 세상은 참으로 시비의 바다이고 표범과 호랑이가 득실대는 곳이다. 여기서 홀로 자유자재할 수 있는 사람, 진정한 자유인이 되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새해 새 아침에 만난 선지식은 무한한 자비로 길을 열어 주었지만 아둔한 중생은 또다시 시비의 바다, 득실거리는 범의 무리 속으로 돌아와야 했다.
글=임연태 사진=박재완 기자 |

현대불교신문에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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